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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지나치게 화려해서 문제였을 조선 인조 대의 한양도성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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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화려해서 문제였을 조선 인조 대의 한양도성 북쪽 | mbong.kr 엠봉

- 창덕궁과 창경궁


인조 초기에 혜화문이나 숙정문 등에 올라서 한양도성을 보면 정말 볼 만했을 거다. 황폐화되어 터만 남아 있는 경복궁이 있고,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는 양반들이 모여서 사는 북촌이 있었다. 경복궁 서쪽에는 자수궁이 존재했으며, 그보다 더 서쪽 인왕산 아래에는 경복궁보다 더 컸다는 인경궁이 존재했다. 또한, 인경궁 서남쪽에는 경복궁보다 조금 작은 수준의 경희궁이 있었다.

한양도성 북쪽은 극단적으로 화려했다. 경희궁 - 인경궁 - 자수궁 - 경복궁 터 - 북촌 - 창덕궁, 창경궁 - 교방으로 구성된 라인업. 경복궁 터 아래에는 육조 거리가, 창경궁 아래에는 종묘가 있었다. 성균관 동쪽으로 조금 더 공간이 있긴 하지만, 여기에 송시열을 비롯한 거물들이 살았던 것, 교방이 있었던 것, 흥덕사와 같은 사찰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임진왜란 이후엔 한적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아래 지도에서 흥인지문에서 돈의문까지 일직선 선을 긋고 그 위쪽은 궁궐, 관청, 양반 나으리들의 집, 사찰로 가득찬 공간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물론 고위직 양반들만 산 게 아니고 시중을 드는 노비와 양반에 보조를 맞춰줘야 하는 양인들의 초가집이 대단히 많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어쨌든 꽤나 볼 만했을 거다.

지나치게 화려해서 문제였을 조선 인조 대의 한양도성 북쪽 | mbong.kr 엠봉

그럼 그 남쪽은 어땠을까?

지금은 남산골 한옥마을이 존재하지만, 이건 조선시대 말기부터 남촌이 주목을 받으면서 그쪽으로 옮겨간 왕족과 양반들로부터 비롯된 거고 실제로 남촌은 가난한 지역으로 유명했다. 고위 관직에 있어도 청렴한 양반 혹은 관직에서 소외되거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가난한 선비들이 살았다. 하급 관리들도 이곳에 거주지를 틀었으며, 군영과 같은 군사 관부도 남쪽에 있었다. 조선 후기로 가면 이런 현상이 더욱 가속화되어 학자로부터 남쪽은 가난한 이가 사는 곳으로 정착되어버렸다는 한탄을 얻기도 했다.

한양의 거대 궁궐이 죄다 북쪽에 위치하고 육조거리도 북쪽에 있었으니 거기에 맞춰서 출근 거리를 줄이려는 양반들이 죄다 북쪽에 거주하길 희망했고, 자연스럽게 북쪽과 남쪽의 차이가 극심해진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인조 초기의 한양도성을 높은 곳에서 살펴보면 빈부격차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북쪽엔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 다섯 개, 아래 사진과 같은 양반들의 건물이 초가집과 뒤섞여 있었을 테고, 남쪽에는 이따금씩 보이는 기와집을 제외하면 대부분 초가집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지나치게 거대했던 왕성, 한양도성의 민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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