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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광개토 시기 신라를 침략한 왜군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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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 시기 신라를 침략한 왜군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 mbong.kr 엠봉

(사진은 그냥 참고용이고 릉비는 아님)


광개토대왕 시기 백제 상대로 남진을 하였는데 여기서 왜군이 침략한 것은 아주 유명한 이야기임. 그렇기에 실제로 임나일본부설의 증거 중 하나로도 쓰였지.

1. 399년 백제는 참전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릉비에서는 백제 신라가 원래 고구려 따까리인 것 마냥 서술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음. 원래 이런 부풀리기는 흔한데 백제도 고국원왕 사살한건 사실인데 효수한 적은 없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말하고 그럼.

고구려군이 왜군을 썰었다고 적혀는 있지만 백제가 빠져있으며 고구려 입장에서 백제군도 같이 합류했다면 부풀렸으면 부풀렸지. 백제 가오 살려주려고 뺄 이유는 없으며 또 릉비에서 백제 두들겨 패는 거 나오는데 이 전쟁만 누락한다는 건 대단히 부자연스러움.

또 고구려군은 백제와 왜와 화통하여 일어났다고 분명 명시하고 있음에도 백제가 나오지 않았다는건 백제의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아신왕이 징발한 년도가 399년이다. 즉 아신왕은 왜와 가야랑 연계하려고 했던 증거는 보임. 그런데 문제는 아신왕이 허구한 날 털리면서 민심이 이반됐고 이에 복속하지 않거나 넘어가는 애들이 많아지면서 호응을 못한거임. 이렇기에 릉비에서 서는 왜국만 나와있다.

그리고 고대 국가들은 조선 같은 나라들과 달리 강력하게 통치를 못하고 있었고 백제 역시도 전라도 지역을 완벽히 장악하는 왕 시기를 동성~성왕 시기로 봄. 이렇기에 아신왕의 징발은 한계가 있었을 수 밖에 없었다.

-릉비의 성격

임나일본부설은 의외로 한중일 사서 모두 교차검증되기에 한국 사학계가 크게 고전한 적도 있었음. 대표적으로 릉비 신묘년조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임나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기사를 일본서기 오진 8년 조에 왜가 백제의 아화왕을 페위 시키고 직지왕을 즉위 시켰다고 한 기사가 사건의 시작과 끝을 알려준다고 해석했음.

또 칠지도도 증거로 삼았는데 백제가 일본한테 바쳤다라고 이해했었음. 이에 당연히 한국인들도 반격했고 현재는 한국의 승리로 끝나고 더이상 일본도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고 주장 안함. 대표적으로 가야가 독자성을 유지했음이 증명되면서 고고학 자료가 일본의 주장을 무마 시켰고 광개토왕비를 새롭게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이 제기된 것으로 격파함. 중국 측 기록도 걍 중국 애들은 관직 암거나 퍼주기로 유명하며 일본서기의 성향 역시도 천황중심적인 서술이 많음.

이에 릉비의 신묘년 기사는 비판적으로 검토해봐야 하며 과장된 어투는 감안해야한다. 의외로 백제 측에서 고구려 상대로 힘들게 한 적은 있었지만 릉비에서는 당연히 이런 내용들은 별 거 아닌 것 마냥 적혀있다.

2. 호족들이 집단으로 온 것인가?

왜와 친한 백제의 의도는 고구려의 무력에 대항하려는 목적이었다. 그 대가로 왜는 철과 선진문물을 얻었으며 일본서기에서도 그 사자에게 보낸 것 중에 철이 포함되어있다.

타케히코는 신라를 위험에 빠뜨린 주체를 왜군이라고 보고 있지만 대신 왜왕의 위광과 주도력이 아닌 전쟁에 참가한 후에 주어지는 물질적 보답에 대한 기대가 컸고 실제로 한반도 문물, 선진 기술, 생활 양식 등이 이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의 규모로 열도에 들어온다고 한다.

실제로 전쟁 전후로 선진문물 규모가 커졌다는 고고학 증거가 뒷받침해주며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봤을 때 고대 일본의 통일은 그렇게 빨리 되지도 않앗음.

실제로 고고학 성과를 보면 왜왕권이 강력하게 영향 행사했던 시기는 꽤 늦었으며 6세기에 일어난 이와이의 난도 이와이의 난이 아닌 전쟁으로 보는 게 맞다는 의견도 있다. 그 이유는 이와이는 독자적이었고 이질적이라서 그럼. 대표적으로 이와이는 친신라였음.

이후 왜국의 침략이 가면 갈수록 줄어드는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지만 우선 여기는 릉비 내용만 설명하니 나중에 소개해보겠음.

이쪽은 왜군이 사실 대군은 아니라고 한다. 이것도 고고학적 증거에 기반하는데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많은 왜인이 체류했다는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임진왜란 때 일본 병력이 주둔한 왜성이 축조되었고 이는 남부에 남아있는데 그런 기지가 확인되지 않는다는거임.

또 릉비는 과장이 심하기에 왜군의 병력 자체를 부풀려서 썼을 가능성이 있으며 399~400년의 대군이 머물 정도면 주둔지가 필요할텐데 크게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대신 미래에는 나올 수 있기에 확신은 못한다고 함.

단 광개토왕의 위대함을 연출하려고 왜를 강대한 세력으로 연출해 왜도 강하지만 그 강한 왜를 그냥 썰어버린 고구려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냐고 생각하고 있다.

4. 백제가 배후에 있었다

403년에 고구려의 침략으로 아파하던 백제가 신라를 침공했다. 또 399년 말고도 393년 신라 왕성인 금성을 5일동안 포위하고 405년 왜가 금성근처로 쳐들어가 왕성을 지키는 명활성을 공격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399년이 다른 침공에 비해 가장 강력했다. 이렇기에 백제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크게 패한 왜군은 본국으로 가지 못하고 가야로 갔으며 광개토가 쫓아왔다. 이후 변화를 보면 신라나 가야나 둘 다 무기 체계가 변화하였다고 함. 그러면 문제점은 이 전쟁에서 백제가 누락 된 것이라는거임.

이는 고구려의 천하관으로 어느 정도 설명은 가능하다고 하는데 왜는 고구려 천하 외부의 적으로 고구려의 인식에서 백제랑은 근본적으로 달랐음. 이에 신모년 기사를 비롯해 능비에서 왜와 관련한 광개토왕의 무력이 강조된 것은 천하에 속하지 않는 외적을 물리치는걸 보여주고 싶어서이다. 이렇기에 왜적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상향을 먹었다고 할 수 있음.

실제로 릉비에서 왜는 속민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조공의 의무를 가졌다고 하지 않을 정도로 봤음.

난 일단 399년 전투는 백제가 호응하지 못했다를 믿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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