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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고구려 초기 왕들은 혈연 관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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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초기 왕들은 혈연 관계일까? | mbong.kr 엠봉

고구려 초기를 이해해보자.


고구려 정치는 크게 3가지로 나누어진다. 고구려 초기 나부 체제, 고구려 중기 중앙집권 체제, 고구려 후기 귀족연립정권이다. 귀족 연립정권은 평원왕 때 극복됐다 아니다로 나누어지는데 이건 연개소문 글에서 따로 다루겠다.

이렇기에 고구려 초기 왕위계승을 이해하려면 필수적으로 고구려 초기 나부 체제에 대한 이해도 같이 있어야함.

1. 나국이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학계는 나부체제론자와 집권체제론자로 양분된다. 나부체제론자는 나부를 자치권을 지닌 단위정치체로 파악하고 계루부 왕권과 함께 초기 정치체제에서 중요한 것으로 상정하는 한편 집권은 왕권강화와 집권화를 강조해서 나부를 정치 운영의 주체로 설정하지 않는다. 또 무조건 딱딱 갈라지는게 아닌 서로 타협은 존재한다.

그러면 그 타협점은 어디일가? 우선 아무리 집권체제론자라고 해서 나부가 독자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부인 안한다. 나부의 자치권 역시도 당연 인정한다. 반대로 나부체제론자 역시도 계루부 왕권의 영도력이 확립되고 더욱 강화된 것을 인정함. 그리고 나가 계루부 애들 중심으로 뭉쳤고 중앙집권화 단계로 전환한 것도 집권 체제론자 대부분이 인정하는 사실임.

나국은 삼한과 같으며 나국 안에 또 나가 있었다. 계루부의 통제를 받았지만 군대도 있었음.

태조왕 시기 대외정벌 보면 주나 조나가 있는데 부라고 적혀있지 않은 이유도 마찬가지임. 나부의 규모는 2000~3000가로 고구려 초기 인구 생각해보면 대규모이고 계루부 말고도 다른 부들도 있었기에 계루부 애들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웠음

2. 사실 우리가 아는 고구려 왕들은 오류가 있다

주몽부터 다루겠음. 주몽에 대한 학설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여기서는 스킵하고 주몽 집단의 계루부가 원래부터 가장 강했다.

해씨 고구려설 반론으로는 주몽의 무덤이 오녀산성에 있고 이는 계루부 지역인데 다른 부들이 거기서 왕노릇했다는 건 힘들다.그렇지만 고대사에 낙랑 위치급 아닌 이상은 100%는 없다. 낙랑군 위치는 100% 확실하게 평양에 있음. 유사역사학자들 거르삼.

정리하면 졸본 지역의 비류국이 일찍부터 나국으로 성장해 가오 잡고 있었는데 부여 방면에서 남하한 주몽 집단이 활, 말, 종마 구별 능력 등을 갖춘 군사력 등 우수한 종자를 지닌 농경 기술 등등으로 모둔곡, 소서노 집단과 연합해 세력을 확대하여 소노 집단을 누르고 나국 연맹의 맹주가 됐다는 것이다. 선진 문물을 바탕으로 토착민들과 연합하였음.

이 당시 동명성왕부터 유리명왕 초기까지 모둔곡 골천 곡 천 집단을 편제하는데 그치기에 계루부의 통제력을 볼 수 있음.

그러면 고구려 왕권이 매우 미약하다는 게 증명됐고 나국에 관한 견해도 나국이 반독립적인 세력임은 누구나 다 ㅇㅈ함.

이렇기에 고구려 초기는 마치 부자계승처럼 되어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고 후대에 윤색된 기록을 받는 것이다. 간혹 고구려 기록을 문면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다면 몇가지 치명적인 오류가 생김

고구려 초기보다 더 발달한 6대에 다시 왜 형제 계승으로 퇴행했는지 매끈하게 설명할 수 없고 위서 고구려전은 삼국사기 1~5대 왕계와 조금 다른 초기 왕계를 전한다. 이렇기에 삼국사기 등 기록은 초기 왕계를 정립하면서 생긴 윤색된 기록이고 고구려 초기 왕계는 6대 태조왕계부터 성립된 것이다.

이렇기에 유리명왕 시기 태자들이 죽어나가거나 모본왕이 쫓겨나거나 이런 일들도 이해가 됨.

우리는 주몽의 아들을 유리명왕, 비류 온조로 알고 있는데 비류 온조는 확실히 주몽 자식들이 아님. 그러면 유리명왕은? 아닐 가능성이 높음. 삼국사기 보면 동명성왕 재위 중에는 유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마지막 19년조에 유리의 남하, 태자 책봉, 시조 주몽의 사망 등이 나옴. 그런데 이 모든 일이 몇개월에 끝? 상당히 수상함. 이는 주몽와 유리를 부자 관계로 이으려고 만든 기록임.

동명왕편은 구삼국사 바탕인데 주몽의 건국 과정을 보면 태자가 남겨둔 옥편을 갖고 용산에 장사 지냈다라는 기사 제외하면 유리와 관련 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음. 결정적으로 주몽이 짱먹을 수 있는 이유는 선진적인 애들을 데리고 내려왔는데 유리 역시도 옥지 구추 도조 등을 거느리고 남하했다고 함. 이는 유리가 정치적 기반이 있었다는거임.

유리명왕 시기 태자들이 잘 죽는데 이것도 혈연보다는 왕위계승 자체가 영웅적인 모습을 보여야 하기 때문임.

고대 동아시아로 눈을 돌리면 이상한 것도 아닌 게 일본으로 보면 비혈연적 관계임에도 기록으로는 부자 관계로 기술 되어있음(의강명자). 또 유리명왕과 대무신왕은 책봉 이전에 왕자로 자질이 드러남. 대무신왕 일화는 ㄹㅇ 골 때리는데 부여군을 이겼다고 한다. 뭐가 문제냐 싶겠는데 이때 대무신왕 나이가 초등학생 정도 된다. 또 왕위 오를 때 부여에서 무슨 판타지 생물 보내는걸 논파하거나 판타지스러운 기록들이 있음. 유리명왕 역시도 칼조각을 바치자 주몽이 자신이 갖고있는 칼과 합쳐 태자로 책봉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유명한 일화인데 그 뒤는 유리가 몸을 솟구쳐 들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가로막는 신성한 이적을 보였다고 함. 대무신왕 기사랑 마찬가지로 이건 아예 판타지 내용.

즉 결론은 영웅적 왕자관이 중요하며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힘든 것이다. 혈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소리.

그렇지만 고구려 태조왕을 기점으로 왕권이 강화되면서 형제계승으로 변한다. 그렇지만 삼국사기에 의하면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의 재위기간은 무려 127년인데 이것조차도 사실은 친형제가 아니라 차대 신대는 가까운 친척으로 보기도 함. 그리고 태조대왕과 신대왕의 나이 차는 42살이나 차이나는데 이걸 친형제로 본다는 게 말이 안됨. 아무리 막둥이라도 42살 차이는 좀...

그렇지만 형제가 강조되기에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친척이나 방계로 볼 수 있고 셋 다 고령에 오른 왕이라고 보면 됨. 그니깐 원래 나이 차이 별로 나지 않고 태조대왕이 장기 집권하면서 차대 신대는 고령이라는거지. 그렇지만 이들 관계를 사서 내용처럼 부자나 숙질로 보기도 함. 그런데 ㄹㅇ 부자라면 굳이 형제를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싶긴하다.

간혹 태조대왕의 재위기간이 너무 길다는 점을 들어 태조대왕이 2명이다라는 넷상 피셜 보기는 봤는데 기록으로 전혀 근거가 없고 책에서도 매우 다양한 학설이 소개되는데 2명이다라는 설은 아예 언급 조차도 안된다는 점에서 별 신빙성이 없음.

그러면 고구려의 진정한 부자계승은 언제부터인가. 동천왕 때부터인데 동천왕 시기에는 나부 체제가 해체되고 국앙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맞물리는 시기였음. 그런데 고구려 초기는 나부의 힘이 왕성할 때인데 부자계승은 말도 안되며 1~5대가 과연 찐혈연적 관계인지 다시 재고해볼 필요가 있음.

3. 비류와 온조

백제가 고구려에서 내려온 건 고고학적으로 확인됨. 대신 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은 절대로 아님.

시조형제설화라고 한다. 가야 역시도 시조형제설화가 있다. 그니깐 이 둘이 연맹하였고 후대에 그 관계를 합리화하려고 형제 이데올로기를 만든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동아시아로 보면 대가야 시조인 뇌질주일과 금관국주인 뇌질청예가 천신 이비가와 가야산신 정견모주 사이에서 형제로 태어났다는거다. 왜냐면 역사를 보면 가야 초기 맹주국은 금관이었고 이후 대가야가 패권을 잡아서 시조형제설화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어디까지나 일종의 설이지. 정설은 아니니깐 그냥 참고만 하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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