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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조선군 8만 명이 무너져서 어쩌면 다행스런 전투 - 용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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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ong.kr/issue/1890508 복사

임진왜란 당시 함락된 한양성을 수복하기 위해서 전라도와 충청도의 군사에 소수의 경상도 군사가 합쳐져 대군이 조직된다. 병력은 5만(실록에 따르면 8만)에 달했는데, 조직 중간에 반란이 일어난 지역이 생겨서 와해된 병력이 있었기 때문에 본래는 실록의 8만을 동원한 게 맞을 수도 있다.


조선의 대군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군하던 이광은 백광언 등에게 약간의 병사를 주어 와타나베 시치에몬이 이끌던 600명의 일본군과 교전하도록 했다. 와타나베 시치에몬은 첫 전투에서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고, 문소산의 병목에 진을 세워 지키면서 한양에 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본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조선군 8만 명이 무너져서 어쩌면 다행스런 전투 - 용인 전투 | mbong.kr 엠봉

선봉대와 백광온의 패배 소식을 들은 조선군은 사기가 떨어졌지만, 그래도 워낙 대군이었기 때문에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공격을 감행할 거라 생각을 안 한 모양이다. 느긋하게 아침밥(한국인은 밥심!)을 지어먹던 조선군은 갑자기 나타난 일본군에 크게 당황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일본군임에도 순식간에 최전방의 군세가 무너졌고 전방에서 후방까지 공포가 전달되어 조선군 5만이 전부 도망쳤다.

이게 바로 임진왜란에서 가장 굴욕적인 전투라는 용인 전투다.

조선군 8만 명이 무너져서 어쩌면 다행스런 전투 - 용인 전투 | mbong.kr 엠봉

- 이제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독성산성..

다만 이 용인 전투를 조금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다행일 수도 있다는 것.

용인 전투 당시의 조선군은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훈련이 철저히 되어 있는 병력이었다. 용인 전투 직후부터 흩어졌던 조선군들이 의병, 관군의 형태로 각지에서 다시 일어나면서 일본의 대군을 상대로 처절한 싸움을 벌였다. 애초에 백광언의 선봉대부터가 초전에는 일본군을 털어먹었다. 훈련이 안 된 병력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상대는 전국시대를 거친 일본군이다.

그럼 뭐가 부족해서 용인 전투에서 황당하게 흩어졌느냐. 경험이다. 당시 조선군은 훈련은 되어 있으되 전쟁 경험이 부족했다. 피맛을 본 적 없는 군대는 쉽게 공포에 사로잡힌다. 당시 광주목사로 군을 이끌어 종군하고 있던 권율은 이 사실을 직시하고 사령관인 이광에게 군을 움직이지 말 것을 당부했다. 권율과 다른 의견을 낸 장수들도 근본적인 부분에선 같은 생각이었다. 경험이 없는 군사를 함부로 움직여선 안 되니 일단은 대기하자는 것. 그게 성채와 길을 만들고 임진강을 끼어서 지키느냐(권율) 아니면 수원의 독성산성에 가서 진을 치느냐의 차이였을 뿐이다. 그러나 사령관인 이광은 자질이 부족했으며 조선군의 수준을 믿고 빠르게 한양으로 진군하려 했다. 그래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무너진 것이다.

조선군 8만 명이 무너져서 어쩌면 다행스런 전투 - 용인 전투 | mbong.kr 엠봉

- 이분 말을 들었으면 임진왜란은 일찍 끝났을 수도 있습니다

이 사실에 착안해서 생각해보면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군이 흩어진 건 분명히 다행이다. 이광은 5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평안도와 평양성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의 군세를 제외한 나머지 병력이 이 5만 명의 조선군을 잡으려고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의 실력이 이광보다 월등했음은 당연한 이야기고, 군사의 질로 봐도 훈련은 되어 있어도 경험이 부족했던 조선군은 그저 먹잇감에 불과했다. 경험이 부족한 병력이 공포에서 벗어나 자기 실력을 내려면 사령관의 역량이 절대적이다. 사령관이 뛰어나면 사기를 진작시켜서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상기한 바와 같이 이광은 뛰어난 사령관이 아니었으므로 일본의 대군과 붙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왔을지는 뻔한 이야기다. 아마 조선군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습격으로 조선군은 흩어지기만 했을 뿐 병력 자체는 큰 손해를 입지 않았다. 그들은 도적이 된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다시 조선의 장수들에게 모여들거나 지방의 유력가에게 몰려들어 의병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임진왜란 내내 활약했던 전라도 출신 의병들은 대부분이 본래 관군이었다.

이광은 자신의 실수를 통감했는지 권율에게 도절제사 자리를 주어 전라도 병력을 통솔하게끔 한다. 이후 조선의 의병과 관군들은 권율의 지휘를 받으며 서서히 다시 편제되기 시작하고, 나중엔 구분이 사라진다.

어쩌면 우린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대담한 기습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끄읕.

잡담

1)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전국시대에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고 와키자카에게 패배한 조선군을 비하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미 거대 다이묘들이 자리를 잡은 전국시대 말기의 부장 출신이라 그렇지 능력이 훌륭했던 건 분명한 인물이다. 그는 굉장히 냉철한 인물이라 다른 다이묘들이 자신의 전공을 과장하고 실패를 축소하는 식으로 기록을 남긴 것과 다르게 굴욕적인 사건까지 하나하나 기록해놓았다. 그가 내놓은 계책들이 하나 같이 훌륭해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정말 많이 아꼈다고 한다.

2) 와키자카는 일본 수군의 대표가 아니었다. 일본 수군을 대표하는 인물은 구키 요시타카. 해전의 신이라고 불렸던 인물이다. 그러나 일본인 중엔 이 구키 요시타카가 임진왜란에 참여한 줄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구키 요시타카가 이순신에게 패배하면서 절망을 맛보고 이후에는 직접 전투에 뛰어들지 않은 탓이다.

3) 권율은 용인 전투 직후 흩어진 병력을 수습해서 이치를 방어했는데, 일본군 6군 사령관인 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군세를 겨우 1500명으로 막아낸다. 권율은 전쟁이 끝난 뒤 행주대첩보다 이치 전투를 훨씬 자랑스러워했을 만큼 대단한 업적이었다. 한일 학계에서는 이치 전투를 임진왜란의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4) 임진왜란은 일본 쪽의 기록이 부실할 때가 많다. 흐름과 상관없는 엉뚱한 전투를 조명하는 경우도 빈번한데, 이는 일본에 막부 시대가 열린 이후로 국가에서 편찬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막부 이후의 일본 기록은 대부분 다이묘들이 자신의 가문에 대해 남긴 기록들로 나라 전반에 걸친 기록이 아니다. 그런 가문의 기록조차 와키자카 정도를 제외하면 업적을 크게 띄우고 실패한 걸 최대한 축소하려 들었기 때문에 전국시대의 연구하는 역사가들은 각 다이묘들의 기록을 교차검증하고 고고학 검증까지 거쳐가며 연구해야 했다. 사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 전국시대의 이야기 중엔 에도 시대와 메이지 시대에 적힌 소설들을 바탕으로 하는 것도 상당히 있는 편. 일본 사학계는 지금도 열심히 여러 가문의 기록을 교차검증하고 고고학적 발전의 성과를 내면서 소설과 다른 실제 역사를 찾아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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