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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전국시대를 다룬 사서들을 두루 살펴보고 느낀, 진나라 통일의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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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ong.kr/issue/2079925 복사

사기, 자치통감등의 사서를 보면서,


중국인들이 제작한 춘추-전국시대 지도에서 직접 사서에 나오는 지명을 찾아서

어디서 전투가 벌어졌는지를 직접 지도를 통해서 대조해보면서 사서를 다 읽어봤음

내가 예전에 춘추시대에 대한 글을 쓰면서

왜 춘추시대 역사를 읽게 되었는지를 "진(秦)나라가 어떻게 통일하게 된건지 궁금해서"라고 썼었는데

그 원인을 확실히 알게 된 것 같음.

1. 진(晉)나라의 분열.

이게 가장 큰 요인이라고 생각함.

진(晉)나라가 셋으로 쪼개진 직후의 각국의 국력을 보면

제나라나 쪼개진 삼진이나, 인구, 병력등으로 봤을 때는 결코 진(秦)나라에 비해 밀리지 않았고

특히 오히려 위나라는 진(秦)나라보다 명백히 더 강한 나라였음.

저런 삼진이 셋으로 뭉쳐있었다면 아마 진(秦)나라는 통일을 못했을 것.

[진나라 - 위나라의 국경지역]

전국시대를 다룬 사서들을 두루 살펴보고 느낀, 진나라 통일의 요인. | mbong.kr 엠봉 전국시대를 다룬 사서들을 두루 살펴보고 느낀, 진나라 통일의 요인. | mbong.kr 엠봉

아무래도 지도를 봐야 더 이해가 잘 될 것이므로 설명하고 넘어가려고 함.

위문후 집권기였던 기원전 403년의 상황.

위나라가 가장 강했던 시기의 영토 상황임.

지도를 보면 진(秦)나라의 수도인 함양 동쪽으로, 황하가 북쪽에서부터 내려와서 ㄴ자로 굽이쳐서 흘러가는데,

바로 그 ㄴ자로 굽이쳐 흐르는 부분이 전국시대 초중기 진(秦)-위의 격전지 대부분이 집중되어 있던 황하 주변의 땅임.

ㄴ자 안쪽을 하동 혹은 하내라고 부르고

ㄴ자 서쪽을 하서, ㄴ자 바깥을 하외라고 부르는데,

하서, 하외에서 위나라가 진(秦)나라를 막아내지 못하면서, 결국 황하 안쪽까지 침입을 허용하게 되고

위나라는 원래 전국 초기 위문후라는 걸출한 군주를 만나 전성기를 구가했었고

이때는 진(秦)나라도 위나라를 넘보지 못했음.

위문후는 그 유명한 오기에게 하서지방을 맡겨서 진(秦)나라를 방비하게 했고

여기서 위나라는 진(秦)나라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면서 전국시대 초기 패권을 잡았었음.

게다가 위문후가 현명했던 또다른 이유는, 이때 조나라, 한나라가 서로 다투다가

위문후에게 사신을 보내서는 함께 상대나라를 공격하자고 요청하는데

위문후는 조나라, 한나라의 요청을 부드럽게 거절하면서

삼진이 서로 싸우지 않도록 화해를 주선했음.

춘추시대 최강의 패권국인 진(晉)나라의 후신인 조,한,위 세나라가 똘똘 뭉쳐있는 이상

그 어떤 나라도 이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지...하지만 위문후가 죽고 난뒤 그런 억제력이 사라지면서

삼진은 서로 피튀기게 싸우다가 진(秦)나라의 동진을 막지 못하게 됨.

결국 위나라는, 진(秦)나라를 거의 혼자 상대하다가 신나게 쥐어터지고 황하 서쪽의 땅을 다 내주게 된다.

그 이후로 진(秦)나라가 황하를 넘어서 하동땅을 침략하면서 위나라는 하내(하동을 비롯한 황하 안쪽의 땅)땅을 다 잃어버림.

위나라가 하동을 진(秦)나라에 빼앗긴 뒤로는 사실상 진(秦)나라를 막을 나라가 없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진(秦)나라의 통일은 거의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음.

2. 위(魏)나라의 영토의 특수성, 동서로 나뉘어져 온전한 힘을 쓰기 힘들었던 위나라의 한계.

전국시대를 다룬 사서들을 두루 살펴보고 느낀, 진나라 통일의 요인. | mbong.kr 엠봉

이 짤을 보자.

저게 삼가분진 직후의 조-한-위 각국의 상황.

위나라는 한나라, 조나라와는 다르게 영토가 동서로 나뉘어 있었음.

그래서 방어해야할 영역도 다른 나라에 비해 더 광범위 했고

진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대고있는 서쪽영토에 온전히 국력을 집중하기도 힘들었으며

또 구원군을 파견하는데도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임.

진(秦)나라의 중원진출을 막으려면 그 역할은

국경을 직접 맞대고 있던 위나라가 해주어야 했는데,

위나라는 진(秦)나라를 막지 못했음.

3. 관중 땅의 사기성

황하, 그리고 진령산맥으로 둘러쌓인 관중의 지형의 역할도 정말 컸다고 생각함.

진나라와 거의 비슷하게 강성했던 제나라가, 전국시대 후기

여러나라의 협공을 받아 사방에서 영토를 빼앗기며, 거와 즉묵 2개의 성만 빼놓고는 죄다 빼앗겼던 그 일을 생각해보면..

반면 다른나라들이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그 공격로가 한정적이었음.

육국이 진나라를 협공한 적이 없던게 아님에도 대부분 별로 성과가 없었던 것도

천연 지형 자체가 사기적이었다는 것이 가장 크지 않나.

군주제 특성상 아무리 나라가 강성해도 대가리 하나가 돌아이짓하면 순식간에 나라가 무너질 수 있는게

군주제의 단점인데, 진(秦)나라는 전국시대 내내 이렇다할 암군이 없었고

오히려 각 군주들이 집권한 시대는 달랐으나 각각 해당 시기에 전국통일을 위해 해야할 가장 최적의 선택만을 해주었음.

전국초기 최강대국이었던 위나라가 위혜왕때문에 몰락한 것이나,

제나라가 제민왕때문에 멸망 직전까지 갔던 것,

그리고 초나라가 초회왕때문에 멸망의 단초가 된 것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비교되는 부분.

진나라는 전국시대 기록 전체를 보아도 딱히 군주들이 삽질을 했다고 할만한 부분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물며 그 폭군이라는 진시황마저도 전국시대에는 굉장히 영명한 군주였음.

5. 상앙의 개혁으로 인한 병영국가화.

많은 역사책이나, 전국시대를 다룬 칼럼등은 이 상앙의 개혁을 진나라 통일의 제1 요인으로 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음.

분명 중요한 요인이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제 1요인이라고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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