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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스포] 호사카 유지 교수님의 영화 '파묘' 평.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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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호사카 유지 교수님의 영화 '파묘' 평.txt | mbong.kr 엠봉

Yuji Hosaka

영화 ‘파묘’가 반일영화니 좌파영화니 민족감정을 악용한다는 기이한 비판이 나왔지만 개봉 12일만에 관객수 600만을 넘었으니 나도 보러 갔다.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이 영화를 만든 장재현 감독은 일본의 음양도를 제대로 공부한 훌륭한 감독이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일본에서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상당한 일본문화가 녹아 들어 있는 영화였다.

이후 음양사들은 일본의 신도나 불교를 이용해 주술적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일본 왕조나 무사정권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다. 한마디로 일본역사에서 음양사, 음양도는 사무라이시대가 끝나 근대화된 일본이 시작된 후에도 1945년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할 때까지 일본중앙정부의 체계화된 직책이었다.

이 영화에서는 그런 일본의 음양사들(=여우들)이 범(=한반도)의 허리를 끊었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음양사들이 조선의 기운을 죽이기 위해 한반도의 허리에 해당하는 땅에 쇠말뚝을 박았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북한산(삼각산)의 정상에는 26개나 쇠말뚝이 한곳에 박혀 있었다고 그것을 기억하는 강북구의 전 공무원이 증언한다. 사람의 이름을 쓴 종이나 헝겊 등에 쇠말뚝을 박아 저주하는 방법은 일본에서 음양사들이 자주 사용한 저주방법 중 하나였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을 도발한 일본의 군부는 음양사들을 시켜 저주의 힘으로 미영 연합군이 불타서 전멸하도록 매일 열렬하게 저주를 올리게 했다. 이런 이야기는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저주는 결국 저주를 잘못 사용한 사람에게 돌아오는 성질이 있어 일본은 도쿄대공습,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로 상징되듯 반대로 자신들이 비참하게 불에 타 버렸다. 음양도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을 잘못 저주하면 그 저주가 자신에게 돌아와 반대로 저주를 받는다는 일본 음양도의 역습을 스스로 체현한 것이 당시의 일제였다.

영화에서 귀신이 말했다. "자신은 남산의 조선신궁에 묻혔어야 했는데 음양사들이 나를 이런 것에 묻었다." 만명을 베어죽여 신이 된 자신은 당연히 조선신궁의 신이 되어 조선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야 했는데 자신을 이상한 곳에 묻었다고 화를 냈다.

일제강점기에도 일제는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서울을 점령했다. 서울은 사방으로 현무, 청룡, 백호, 주작의 풍수에 맞춰 설계한 도시였다. 그런데 일제는 현무 위치에 있는 북악산 앞에 조선총독부를 세워서 경복궁을 눌러버렸고 주작의 위치인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했다. 청룡과 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과 낙산에는 그 정상에 쇠말뚝을 박았다.

이처럼 일제는 수도 서울(한양)을 점령했을 때도 근대적 기법뿐 아니라 음양사들의 풍수지리적 수법도 동원했다. 조선에서 풍수지리는 국가와 왕의 기를 살리기 위해 활용되었으나 일본에서 풍수지리는 막부의 기를 살리는데도 사용되었지만 음양사들에 의해 상대를 저주하는 기술로도 많이 이용되었다.

출처 : 호사카유지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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