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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월남전 청룡 9중대의 위대한 승리 - 푸옥록(phuoc loc) 30고지 전투 (상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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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 청룡 9중대의 위대한 승리 - 푸옥록(phuoc loc) 30고지 전투 (상편) | mbong.kr 엠봉 월남전 청룡 9중대의 위대한 승리 - 푸옥록(phuoc loc) 30고지 전투 (상편) | mbong.kr 엠봉 월남전 청룡 9중대의 위대한 승리 - 푸옥록(phuoc loc) 30고지 전투 (상편) | mbong.kr 엠봉

- 서 문 (해병대포병 김세창 중위) -


짜빈동 대첩의 화려한 명성으로 해병전사에서 그 빛이 묻혀버린 푸옥록의 전투는 이제 서서히 해병 모두에게서 잊혀히고 있습니다. 그 때의 용감한 전사들은 지금은 점차 찾아보기 힘들어 가고 있습니다.

투망작정에서 상당히 전사나 부상을 당하였고 그중에 전사한 소대장2명(전창우소위, 김진철 소위)과 당시 선임하사 이영구(7년 전에 병사)가 세상에 없는 처지이라서 안타깝습니다.

청룡9중대의 푸옥록30고지 전투는 반드시 후배 해병대원의 정신교육에 꼭 전수되어야 하고, 해병전사에 당당히 그 진정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용안작전의 일부분으로 취급되어 있으나 이 전투는 전사에서 독립적으로 부각시켜주어야 합당합니다. 그 당시 전과는 추라이지역 전투사에서 숫자상으로도 확연히 돋보일 만하였고 적 사살 110명이나 됩니다. 추라이 전선에서 이처럼 많은 적을 사살한 예가 짜빈동 대첩이외에는 없습니다.

용안작전 초기에 2대대의 고전으로 피해가 막대할 때, 대규모 부대와 싸워서 추라이 지역에서 최초의 대 승전으로, 청룡부대 전체가 사기충천의 계기가 되었고, 최전방 중대들은 포병 화력지원을 적절히 운용하여 작전에서 필승할 능력이 있다는 점을 확인한 전투였기 때문에 전술, 전략적으로 월남전에서 중대전술에 전기(轉機)가 되었다는 면에서 다시 재조명하여야 합니다.

짜빈동진지는 거의 완벽한 야전 축성진지의 방어전이었다고 본다면, 청룡해병 9중대 2개 소대는 전혀 다른 열악한 지형 조건이었고, 진지 역시 매복진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1. 보이지 않는 그림자들

용안 작전(1966년 11월)이 시작되고 1대대 병력이 1번 도로 서쪽지역 일대를 작전을 하고 있었는데 임무를 3대대가 인계를 받았다. 이 작전을 계속하러 짜빈동 진지를 떠나던 오전의 기상은 월남의 우기였다.

첫 출발 부터 억수 같은 세찬 비를 맞으며 출발을 하였다. 행군출발 1시간 첫 휴식을 하는데 그 많은 비가 오는 곳에서도 맨 땅에 앉아 장비 정비며 무기를 휴대하기 좋게 재조정하고 있었다.

특히 어려운 점은 관측장교의 필수품인 지도, 나침반, 무전기 송수화기의 방수처리가 무척 부담을 주었다.

최초 행군 출발 한 시간이 되어서 15분간 휴식을 하던 중에 관측반원 한명이 배변을 보러 보고하고 바로 옆에 있는 숲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잠시 후 그는 놀라서 허리춤을 잡고 숲속에서 뛰어 나왔다.

“베....베트고 ...콩 입니다!”

순간에 놀라 총을 잡고 5미터쯤 떨어진 그곳에 찾아가니 억수 같은 빗줄기만 보일 뿐, 베트콩은 이미 도주하고 없었다.

빗줄기 가 내리 쏟는 관목 사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관측반원의 배설물이 있었다.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풀숲에는 베트콩이 던졌다는 안전핀도 빼지 않은 미제 세열수류탄 한 개만 보였다.

아군 관측반원이 쭈그리고 앉아 있던 그 순간에 척후 정찰을 나온 적의 정찰병이 우리 관측반원을 보고 놀라 베트콩이 던지고 간 수류탄이었다. 안전핀도 뽑지 않고 던져진 수류탄이라... 그것도 노획무기로 쳐야하나....?

용안작전 시작부터 적들은 이미 우리 9중대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었다. 또한 작전 중에도 농부로 위장한 베트콩 한명이 숲에서 도망치다 우군의 총에 피살되었는데 놀랍게도 그의 수첩에서는 잘 다듬어진 몽당 색연필이 있었는데, 지도 상항판에 쓰는 세 가지 적,청,흑색의 연필이었다.

이는 분명 작전지도 표시용 필기구였으며 부비트랩 용 인계철선도 주머니에서 나온 걸로 보아 전방 관측병이나 정찰요원이었다.

보이지 않는 맹수처럼 계속 그림자같이 청룡부대의 움직임을 여기저기서 관측하고 있었다.

작전개시 4일째인가? 식량이 떨어져서 물도 먹지 못하고 굶은 채 정찰 및 적 탐색은 계속되었다. 만 하루가 지나 4끼를 굶었다.

비는 계속 내리는데 물이 없어서 대원들은 지휘관 몰래 도랑에 맑은 물을 보면 엎드려서 물을 먹었다. 손으로 물을 떠먹으려도 손에 흙이 묻어서 그럴 여유가 없었다.

11월18일 보급 헬기 수송이 두차례나 연기되더니 기상이 조금 좋아진 오후 2시가 되어서 헬기가 날아왔다. 무슨 일인지 헬기가 선회만 하였는데 앵그리코 팀에게 물어 보니 적색 연막탄 표시를 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숲속에 은폐지역에 중대원이 있어서 헬기도 우리중대를 보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중대장에게 요구하여 적색연막탄을 구하였다.

가끔 VC(Viet Cong:베트콩의 약자)가 무전으로 헬기를 자기지역으로 유인하여 보급품은 물론 헬기까지 추락시키는 사고가 있기 때문에 헬기 조종사들이 조심을 한다고 했다.

온 몸이 오그라들고 마음이 초조해서 손발이 떨리는 데도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중대장에게 보고도 못하고 자원하였다. 적이 저격을 할 경우 영락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17일에도 헬기가 여러 개의 물통을 5갤론 통에 담아왔으나 높은 곳에서 떨어트려서 물통이 터졌으니, 물은 없고 프라스틱 통만 보급한 꼴이었다. 물을 공급받으려면 완전히 착륙을 해야 하였다.

만 하루가 지나서 오랜만에 씨레이션 식사를 마치고 정찰작전에 임하였다. 중대방석(중대기지)인 짜빈 진지 멀리 서측방의 고무농원 근처를 돌아, 제 7일 째인 19일에도 오후 3시가 되어 숙영할 진지를 찾아야 했다.

2. 최악의 지형 속으로

서쪽으로 약 5000미터 지역은 개활지가 있었고 들이 끝나는 곳에 숲이 있고, 그 뒤는 굉장히 높은 산으로 이어져서 적이 자주 출몰하는 적색지역이었다.

집중하여 쌍안경으로 관측을 하였더니 약 2개 소대정도의 검정색 옷을 입은 병력이 이동하는 징후를 포착하였다. 해포 7 중대(중대장 대위 최웅섭)포로 10 여 분간 고폭탄(순발신관)으로 제압사격을 하였다.

그 후 어제 같은 시각에 중대 야간 방어를 위한 포병 화집점 사격을 전날과 똑같은 시간에 간은 장소에 반복 실시하였다. 이날도 역시 화집점 모두에 첫발들이 정확하게 명중하였다. 역시 장난기는 많아도 전포대장 중위 정건영(해간 32기)선배의 사격지휘 솜씨는 일품이었다.

포를 사격하여 신속하게 명중탄을 때리고 나면 언제나 속이 시원하였다. 그러나 이 열악하고 좁은 지형에서 2개 소대의 병력과 소수의 파견병력10여명(월남군 통역병사 2명 포함)이 하루 밤을 지낼 생각을 하니 그 위기감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내일은 여단본부 경비중대로 부대가 이동한다는 기대가 있어서 병사들은 다소 해이해질까 걱정이 되었다.

3. 새까맣게 다가오는 월맹군들

저녁식사는 씨레이션으로 간단하게 마치고 야전삽으로 내 자신의 개인호를 정비하였다. 초저녁부터 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지친 몸으로 젖은 담요를 덮고 자리에 누어 보았으나 판초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서 잠이 올리 만무하다.

일제 리코 야광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판초위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비에 젖은 눅눅한 습기 때문인지 온몸이 무겁고 불편 하였다.

그런데 너무도 조용하다. 깊은 잠에 떨어진 듯한 op대원들이 신경이 쓰였다.

“서재홍! 무전기 체크해라!”

세 번이나 조용히 불러도 서 수병은 대답이 없었다.

그런 위기감이 감도는 육감과 함께 앞으로 6시간만 잘 참으면 안전하게 여단본부로 철수한다는 기대가 온몸을 휘감아 오기도 하였다.

긴장이 풀린 대원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걱정이 일어났다. 3명의 관측반원 모두를 조용히 깨웠다.

대원들은 피로에 지쳐서 아주 불쾌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어두운 빗속에서 복장과 장구를 정돈하였다.

마음을 누그러트리게 하려고 편한 자세로 앉혀 놓고 조용히 타이르기 시작하였다. 그러고 있는데 바로 그 때였다.

“탕 탕 따 당......”

갑작스럽게 광풍이 치듯이 총소리, 수류탄 터지는 소리, 적의 로켓포탄 터지는 소리, 우군의 크레모어가 터지는 소리로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폭음과 섬광과 탄환이 날라 오는 날카로운 굉음으로 정신이 없었다.

당했구나!

최초의 희생자들은 81미리 박격포반원3명이 있던 개인호였다.

비에 젖은 판초가 섬광에 반사광을 내서 적의 표적이 된 것이다.

우리 관측반은 사전에 비를 맞으면서도 판초로 된 지붕을 철거한 것이 천만 대행이었다.

첫 번째 총성이 나자마자, 포병통신망은 활동을 즉시 시작하였다.

“여기는 촉성루, 미도파 나와라 오버,”

“사격임무 MB341, MB342, MB343 효력사 오버”

우선 적의 공용화기인 기관총진지부터 제압해야 했는데 포병대대 본부 미도파”에서는 거의 동시에 해포 5중대, 6중대, 7중대포로 3개 지점을 거의 동시에 퍼부어 주었다.

정말 다행인건 3개 포대 모두에게 당시의 화집점 9개를 모두 확인 사격을 하도록 해포대 대의 화력 협력체계를 만들어 주어서 절대적인 효과를 얻었다. 문제는 가장 치열하게 기관총을 쏘아대던 지역인 1소대 전면 23미터 고지에 화집점 MB 342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떴다 OP"

무전기소리가 났다.

긴장과 초조함으로 대기하던 1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차라리 무서웠다.

“씨이--욱---!“ “씨이--욱---!“ 하는 포탄 낙하소리와 동시에 대 여섯 군데에서 번개 치듯 섬광이 보이더니

”꽈과광!“ ”꽈과광!“ ”꽈과광!“ ”꽈과광!“ ”꽈과광!“ ”꽈과광!“

뇌성병력보다도 훨씬 큰 소리를 내며 주위에 광범위하게 폭발하였다.

아니 바로 우리 진지에 포탄이 터지는 것 같았다.

화집점 PR사격(정밀제원사격)을 할 때는 포탄 기준포 한발로만 사격하였는데 바로 효력사 를 명령 내렸으니 목표물주변에 그 보다 여섯 배가 되는 6발이 동시에 폭발한 것이다.

그 큰 포탄의 위력은 관측장교인 나도 기절을 할 정도로 무섭게 그리고 가까이에서 명중탄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보병은 해포대의 포탄이 터지는 소리만 들어도 사기가 크게 향상되는 건 참전한 경험자들은 누구라도 인정하고 있다. 중대본부반 60미리 박격포반원에게 조명탄을 쏘라고 중대장과 내가 소리쳤다.

전에도 경험이 있는 포반장은 박격포 반원들은 장약을 최소로 하여 조명탄과 고폭탄 포사격도 날렸다. 워낙 가까운 거리로 발사하기 때문에 터지지 않는 우리의 박격포 탄이 많은 것 같았다. 쏘고 난 후 박격포탄 터지는 소리가 나야하는데 대부분 터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1소대 정면 동남쪽에는 조금 큰 참나무들이 있어서 어느새 나무 위에서도 적들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소대장 김원식이 즉각 명령을 하여 분대장들이 유탄발사기로 반격하였기에 이들은 바로 제압되었다.

1소대 정면에 큰 위협을 주던 MB 341, 342,343이 제압되자마자, 포의 방향을 3소대전면인 동북쪽과 북쪽으로 포탄 사격 방향을 옮겼고 포병대대 조명탄 요청을 시작하였다.

최초에는 60미리 박격포로 조명을 시작하였으나 불과 몇 분도 못 되어 사용 불능이었다. 60미리 포탄도, 수량도 부족하고 비에 젖어 불발이 일수였다.

사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105미리 포로는 조명이 불리하였고, 더구나 주공인 3소대 정면과 포병진지 사이에 적군이 있어서 조명탄 사격은 아주 큰 위험이 되었다.

그래서 고노이 지역에 진지가 있는 4.2인치 박격포로 조명탄사격을 시도하여 60미리 박격포보다 훨씬 좋은 효과를 보았다. 81미리는 반원들이 3명이 전투개시하자마자 전사하고 반장만 넋이 나갈 만큼 놀라서 정신이 없어서 작전 투입이 어려웠다.

지상 800미터 상공에 첫 발이 터진 후 낙하산이 낙하하므로 20초 간격으로 연속으로 쏘아대었다.

안개비가 내리는 구름 낀 하늘이기는 하지만 조명탄 낙하산이 바람에 흔들흔들하며 4~5개가 계단의 가로등처럼 계속해서 일정한 차이를 두고 하늘에 떠서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전투상황이 아니라면 이보다 더 멋진 불꽃놀이가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바로 이 순간이다.

적들의 함성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호각 소리가 나면서 함께 수류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면서 여기저기서 마구 터졌다. 섬광과 폭음이 바로 옆에서 뒤에서 터졌다.

철모위로 흙과 잔모래가 금속성 소리를 내며 내려 쏟아 부었고, 목덜미로 모래와 잔 돌이 때려 쏟아지며 충격을 가하였다.

4. 검은 묘비들 사이로 흔들리는 적들의 그림자들

무전기 2대가 함께 있는 경우 한 번의 수류탄 공격으로 파손되는 위험이 있어서 옆에 있던 2명과 함께 본부반에 떨어져서 합세하도록 하고, 나는 혼자서 무전기를 곁에 두고 사격을 유도하였다.

중대 본부반에 중대장과 가까이 있어야 했는데 그 위치에서는 전방 주시가 되지 않아 3소대장 쪽으로 약간 전진하였다.

바람이 불어 조명탄이 흔들흔들 하며 조명을 비추니 비석의 그림자도 같이 일렁대고 있어서 아주 혼란스러웠다. 더구나 조명탄이 4개나 5개가 하늘에 떠서 빛을 내기 때문에 비석들은 하나하나 마다 여러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서 더 많은 적으로 환각하게 되어 더욱 어려웠다.

그런데 그사이 사이로 수십 명의 적들이 오리걸음으로 접근해오는 것이 보였고 비석을 방어벽처럼 기대서 사격을 가하기 때문에 더욱이 위기감이 돌았다.

소대원들은 육박전 후에 급히 후진하고 나 혼자 있는 상황에 총까지 고장이 났으니 내가 이동할 때 누가 엄호를 해줄 병사가 없었다.

우선 권총을 꺼내어 눈에 보이는 적들에게 연발사격을 하고는 5미터 정도 뒤로 몸을 날렸다. 그래도 내가 최전방이었다.

우선 칼빈총 노리쇠를 군화 발바닥으로 재빠르게 밀었다 당겼다 세 번을 반복하였다. 사격하던 칼빈소총이었기 때문에 총열이나 윗덮개가 어찌나 뜨거운지 손으로 잡기가 어려웠다.

발바닥으로 노리쇠를 미는데 손으로 잡을 곳이 마땅하지 못해서 무척 고생을 하였다. 노리쇠 홈에 묻어있는 진흙이 고장원인이었다.

정말 죽을힘을 다해서 노리쇠를 발로 찼다. 얼마나 다급한 상황이었는지 그래도 순식간에 처리를 하였지만 그 시간에 얼마나 초조하였던가?

세 번째 발로 차서 뒤로 밀은 후에 노리쇠를 당기니 실탄이 밖으로 나오면서 장전이 확인되었다.

다시 전방에서 오리걸음으로 계속 다가오는 적들에게 총을 쏘다보니 다시 3소대원들이 서너 명이 내 곁으로 전진해왔다. 자기들 전방에서 내가 총을 쏘니까 같은 소대원인줄 알고 힘을 내어 전진 방어를 하려고 온 것이다.

내가 있는 1소대전면 능선에서 4~5미터 바로 밑에 있는 관목이 줄지어 있는 곳에서 또 같은 호각 소리가 들리는 걸 확인하였다. 누구의 개인호 인지 모르나 그곳에 엎드려 잠시 동정을 살피는데 잠시 후에 또 호각소리가 들리고 우박처럼 수류탄이 날라 왔다. 터지고, 또 터졌다.

적과 너무 근접하다보니 적이 던진 수류탄들이 전부 내 머리위로 날아가 빈 공간인 1소대와 3소대 거의 중간에서 많이 터지는 걸 알게 되었다.

정말 미친 사람처럼 겁도 없이 마구 연발로 사격을 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뒤로 포복을 하며 후퇴를 하였다 왜냐하면 다시 소대원들이 후퇴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M2칼빈 실탄 한 탄창을 발사한 거리가 적과 20미터도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 제대로 적들을 파악하고 지향사격을 한 것 같았다.

“ 꽈~ 꽈~ ”

찰나(刹那)같은 순간의 생각이었지만 진해 덕산사격장에서 처음 명중을 알리는 스파타(탄착표시판)가 올라왔을 때 느꼈던 희열이 휙하고 스쳤다.

숲에서 호각 소리도 잠잠해졌다.

무언가 결정적인 와해의 기미가 있는 듯이 보였다.

갑자기 긴장이 풀리고 으스스 추위가 몰려오면서 오줌이 마렵다는 걸 인식하였다. 온 몸이 진흙과 빗물로 다 젖어 있었다.

간간히 총알은 날아오지만 호에 엎드린 채로 해포 7중대와 교신을 하다가 허벅지에 따뜻한 물이 흐르는 걸 느꼈다. 잠깐이지만 긴장이 풀리면서 실례(?)를 하였다.

허참! 세상에 엎드려서 총을 쏘며 소변을 보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하늘에서 “펑”하며 조명탄이 번쩍 빛을 발광하면서 터지면 아주 기분 나쁜 소리로 “후루루루 후루루루”하는 소리를 내며 계속 곁에 떨어지고 있었다.

미도파에 상황설명을 하였다. 아마도 사거리조정을 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다시 소대원들이 내 앞으로 포복으로 가는걸 보고는 나도 소대장 곁으로 포복을 시작하였다.

아 ! 나도 지쳤나보다. 앞으로 전진이 되지를 않았다.

아니? 월남 온지 며칠도 안 되는 월남 신병이 내 발목을 움켜쥐고 벌벌 떨고 있었다. 공포에 떨고 있는 그 수병에게 할 말이 없었다.

“야! 내 발 놔! 둘이 붙어있으면 둘 다 죽어, 어서 분대장 찾아가!”

작은 목소리지만 호되게 명령을 하였다.

앞으로, 다시 뒤로, 그리고 앞으로 개싸움처럼, 하이에나처럼 처절하게 적들과 뒤섞인 것이 몇 번이었나?

후퇴라야 10미터 전후. 다시 전진해야 먼저 번 그 자리였다.

5. 계곡 입구부터 근접사격으로 검은 들개들을 박살내다.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가장 용이한 접근로는 3소대 정면일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쪽의 동북쪽 접근로는 조명지뢰도 터지지 않았고 월맹군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고갯길이 있는 능선 너머가 주 접근로라는 걸 전창우 소위와 함께 전투 초기에 감지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삼태기같이 생긴 Y 자형 계곡으로 적이 계속해서 진입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계곡 양쪽 경사면은 가시넝쿨이 가득하여 맨 아랫길에서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거의 없었다. 오직 우마차 정도나 겨우 다닐 수 있는 외길로 연결되어 있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접근로 양측 경사면은 가시 넝쿨로 엉켜 있어서 도저히 야간에는 그길 이외에는 기동이 불가능하였다.

그렇다면 3소대 쪽은 좁은 지역이라 소대 정도의 병력으로도 저지가 가능하다. 그런 단순한 상황판이 서는 입장에서 보면, 3소대 청음초에게 적들의 행동이 일찍 노출되었기 때문에 우리 측에게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조기 경고를 한 결과가 되었다.

MB 346 347 348쪽을 좌우 전후로 계속 반복 포격하면 그거야 말로 독안에 든 쥐에게 수류탄 투척하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또한 MB349 350등은 포병대대작전에서 후속 지원부대의 접근을 막을 요란사격에 들어갔다고 통보가 왔다.

포병대대장 이갑석 중령이 누구인가? 아니 포병대대의 유능한 참모진들은 또 누구인가?

포격이 계속되는 동안 대대 작전상황실 “미도파“에서 중령 이갑석 대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관이 원하는 대로 그곳에 포탄은 명중할 것이다”

“귀관이 앞으로 10미터 전진하면 포탄도 10미터 전진한다! 포병 전부대원이 귀관만 믿는다!”

당시 이갑석대대장의 기본 작전 개념은 일단 중대단위의 작전이 신작되면 우선 포병관측장교가 소속된 1개 포대(포병중대)가 사격임무를 전담하여 수행을 하고, 관측장교의 상황설명에 따라 나머지 3개 포대는 적의 접근 예상로나 집결지, 적의 포병진지를 사격한다.

그리고 추가로 도판운영과 지도상의 지형을 보고 또 청룡여단본부의 정보를 파악하여 적의 추가지원 병력의 이동을 못하도록 거의 원형에 가까운 보호망을 펴며 포격을 해준다.

포탄 유도를 위한 사격임무(fire mission)를 관측장교가 알리면 모든 포병무전은 침묵을 하므로 관측장교 한명 이외에는 누구도 대화가 없는 침묵의 시간이다.

이런 고립된 상황에 처하면 정말 적진에 숨어들어간 고립된 저격병처럼 뼈를 깎는 듯 한 외로움과 공포가 엄습하게 된다. 이런 때 틈을 보아서 잠간씩 무전기로 들려오는 대대장의 격려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로 큰 위로이며 사기를 높이는 힘을 넣어주는 활력의 원천이었다.

짧은 말 그러나 침착하게, 천천히, 굵직하고, 듬직한 말로 격려하던 목소리가 떠올라서 지난 3월 월남격전지 탐방 후에 그분이 묻힌 대전 국립현충원 묘소에서 소리 낮추어 읍소(泣訴)하였다.

하지만 그런 오만한 판단은 청룡 3대대 9중대에게는 먹혀들 수 가 없었다. 럭비선수로 단련된 체력에, 최일선 소대장으로 쌓은 노련한 전투경력을 지닌 전창우중위의 용감한 전술 운용이 적군 1개 대대도 두려움 없이 방어하고 있었다.

이때 계곡에서 전사한 적군 월맹군 중에는 상당수의 월남 민간인 보급지원 병력이 많었고 특히 여자 보급지원군이 상당히 많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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