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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반대로 유명한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영진 전도사의 이야기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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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참배 반대로 유명한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영진 전도사의 이야기 | mbong.kr 엠봉

주영진 (朱寧震, 1919 ~ 1950)


신사참배 반대로 유명한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영진 전도사의 이야기 | mbong.kr 엠봉

주영진 전도사는 주기철 목사와 안갑수 사모 부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미 신사참배 문제로 루터신학교를 자퇴하고 다른 신학교로 전학했음에도 일제의 탄압은 끊이지 않았다. 결국 주영진은 다니던 신학교에서 한학기를 남기고 퇴학당한다. 그때가 1938년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당시 평양형무소에 갇혀있었다.

신사참배 반대로 유명한 주기철 목사의 아들, 주영진 전도사의 이야기 | mbong.kr 엠봉

갈 곳이 없었던 주영진은 결국 귀국하여 아버지의 목회를 돕고자 평양으로 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신변의 안전을 우려하여 오지 못하게 막았고, 결국 주영진은 해방때까지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유랑생활을 하며 어렵게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영진은 부친의 뜻을 이어 목회자로 나설 것을 다짐하였고 8.15 광복 후 주영진은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부임한다. 그가 목사가 아닌 전도사로 부임한 것은 과거 신학교를 다니면서 목사가 되기 필요한 학기 수를 다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였다.

산정현교회 신도들은 담임목사였던 주기철 목사의 큰아들이 서른이 다되어가는데도 장가도 못가고 혼자사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직접 중매를 주선하였고, 간호사였던 김덕성 여사와 결혼하여 1남 1녀를 보았다.

1945년 12월 김덕성을 아내로 맞은 이후 주영진은 장현리에 소재한 장현리교회 전도사로 부임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북한의 기독교 탄압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46년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는 38선 이북지역의 교회는 모두 공산당 산하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주영진 전도사는 이같은 종교 어용화에 반대하여 연맹에 가입하지 않았다. 또한 공산당은 일요일날 선거를 치룰 수 있게 교회를 투표장소로 제공하라고 반협박적 어조로 권유하였음에도 굴하지 않았다. 이후 예배당에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사진을 걸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주영진 전도사는 격렬하게 반대하였고, 결국 보위부 요원들한테 체포되어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난다.

그리고 3년 후 주영진 전도사는 북한의 기독교 탄압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1950년 5월 신의주교회 부흥회를 인도하고 귀가하였다가 내무서원한테 잡혀 끌려간 후 총살당함으로써 32세의 짦은 생을 마감한다.

주영진 전도사의 유족도 마찬가지였다. 김덕성 사모는 5살난 아들과 첫돌이 겨우 지난 딸을 데리고, 구순이 다된 시어머니를 보필하며 월남을 기도했으나, 시어머니의 건강문제로 인하여 결국 월남을 포기하고 북한에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성 사모는 서슬퍼런 공산치하에서도 주기철 일가의 가족 답게 꿋꿋히 기독교 신앙생활을 이어갔으며 죽기전까지도 다른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는데 삶을 바쳤다. 하지만 북한의 종교탄압으로 결국 1970년 그녀 또한 잡혀서 총살당한다. 그녀의 나이 51세였다.

주영진 전도사의 두 자녀는 20대 나이에 어머니마저 잃고 살던 평양에서 추방당하여 함경도 오지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주기철 목사 하면 흔히 신사참배 반대운동만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의 아들 또한 공산당 탄압에 맞서서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정교분리도 중요하지만 주영진 전도사의 삶은 종교와 신앙의 자유 또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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