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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과 주걱턱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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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bong.kr/issue2023/1672161 복사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과 주걱턱의 진실 | mbong.kr 엠봉

유럽의 왕실 가문 중 하나인 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과 주걱턱의 진실 | mbong.kr 엠봉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과 주걱턱의 진실 | mbong.kr 엠봉

뭐 대충 이런 느낌?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중들에게 근친혼의 폐해를 보여준 가문으로 유명하다고 할 수 있음



합스부르크 가문은 결혼을 통한 상속으로 영토를 넓힌 가문으로도 유명함


...? 근데 이 두 키워드에 대해서 생각해보니까 좀 이상한데?


같은 가문 내에서 근친혼만 죽어라 하는데 그 와중에 정략결혼으로 다른 가문의 영토를 얻어올 수도 있다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모순임


합스부르크 가문은 1273년 루돌프 1세부터 1918년 카를 1세까지 65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자리를 지킨 가문인 만큼 가문의 성격이나 정체성에도 많은 변화를 겪어옴


개인적으로는 이 변화를 대략 세 시기로 구분하는데, 1. 스페인 재위 이전 1273년~1506년, 2. 스페인 재위 중 1506년~1700년, 3. 스페인 재위 이후 1700년~1918년이 그것임


1. 스페인 재위 이전 1273년~1506년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황제를 우리 가문이 하니마니하면서 싸우던 시절

영향력은 대부분 중부 유럽 내의 범위에서 한정됨

가문의 위세로 따지면 셋 중 가장 미약하던 시절


2. 스페인 재위 중 1506년~1700년


스페인 합스부르크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로 양분되어 다스리던 시절

지중해에서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에 영향력을 미침

가문의 위세가 가장 강했던 전성기


3. 스페인 재위 이후 1700년~1918년


스페인 합스부르크가 멸문 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합스부르크 제국이 가문의 주축이던 시절

중동부 유럽의 강대국으로서 영향력을 미침

가문의 전성기는 지났지만 명문가로서의 위상


3 시절만 해도 2 시절만큼 극단적인 근친혼은 안 하는 편이었고

1 시절엔 오히려 다른 가문보다 근친혼이 덜한 축에 속했는데 순수하게 소급 적용 때문에 같이 멱살 잡힌 케이스(정략결혼으로 영토를 크게 늘린 것도 대부분 1 시절)


(합스부르크 가문의 주걱턱을 이야기 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카를 5세의 초상화)



따라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주걱턱 역시 오해가 있는 편인데

당장 4대조까지 겹친 조상이 한 명도 없을 정도였고, 카를 5세의 부모인 펠리페 1세와 후아나 여왕 역시 8촌지간으로 유럽 왕가 간 결합치고는 혈연관계가 먼 편에 속했음


??? 그럼 근친혼이랑 주걱턱은 상관이 없는 거임?



당연히 관련이 없지는 않음


아니 ㅅㅂ 방금 근친혼 때문에 주걱턱 생긴 거 아니라며 앞뒤가 안 맞잖아 뒤지고 싶냐?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카를 5세와 같이 주걱턱을 지닌 인물이 등장한 것은 근친혼과 관련이 없지만, 펠리페 2세나 카를로스 2세처럼 주걱턱이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등장한 것은 근친혼의 영향이었다는 소리


오히려 카를 5세때까지만 해도 카를 5세의 외가인 트라스타마라 가문이나



카를 5세의 처가인 아비스 가문의 근친혼 전통이 더 심했음



어쨌든 근친혼 전통까지 포함하여 스페인, 포르투갈의 두 가문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은 1526년부터 1673년까지 연속해서 극단적인 근친혼을 했음



흠... 150년 가까운 세월동안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극단적인 근친혼을 계속해 왔다니 이해하기 어려운 광기네...




합스부르크 가문이 근친혼을 한 이유는 순전히 정치적인 동기였음


뿐만 아니라 지참금과 혼수를 가문 내에서 유통하게 하려는 의도, 살리카 법을 따르지 않는 스페인의 특성상 추후 여왕이 즉위하였을 때 스페인 왕좌가 타 가문에 넘어가지 않도록 보존하려는 의도 역시 존재했음

실제로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멸문 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은 완화되었는데 같은 가문끼리 혼인 동맹을 맺어야 할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들어서 그런 것임

21세기의 시선으로 보면 제 살 파먹기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지만 저 때는 근친혼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이 영 부족했던 것 같음



종교가 다른 가문 간의 통혼은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까다로운 편이었고 특히 가톨릭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던 스페인 합스부르크로서는 가톨릭 가문과의 통혼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음

그러나 다수의 가문들이 개신교로 개종한 상태에서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결혼 상대는 종교 개혁 이전에 비해 매우 좁혀질 수밖에 없었고



불운으로 펠리페 2세의 세 번째 부인 발루아의 엘리자베트나 펠리페 4세의 첫 번째 부인 프랑스의 엘리자베트 등


프랑스 출신의 가톨릭 왕녀들마저 후계자가 될 장성한 남성 상속인을 얻지 못하면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출신의 왕녀들과의 재혼으로 눈을 돌린 결과가 중첩된 근친혼으로 이어지게 됨


뭐 스페인 합스부르크는 그런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문에서 유일하게 프란츠 1세랑 족외혼하고 연애결혼해서 유전병 혁파했잖아?



이건 정말 어쩌다가 퍼진 건지 모르겠을 정도로 잘못된 통념이라고 생각하는데

두 사람의 결혼은 어느 정도 정략결혼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6촌 관계이기도 했음


(프란츠 1세의 증조할아버지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증조할아버지인 페르디난트 3세)



물론 연애결혼의 성격 역시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당대 유럽 가문들의 결합에서 6촌이면 특별히 가까운 친척이라고 보기도 어렵긴 함


알브레히트 2세, 프리드리히 3세, 막시밀리안 1세, 펠리페 1세, 페르디난트 1세, 레오폴트 5세 대공, 레오폴트 1세 등 이전까지 많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주들이 6촌이거나 6촌보다 먼 배우자와 결혼해서 후계자를 낳았음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카를 6세부터가 그랬고

후계자를 낳지 못한 결혼까지 합한다면 펠리페 2세, 펠리페 4세, 페르디난트 3세, 요제프 1세까지 더 많음




요약

1. 합스부르크 근친혼이 심했던 건 맞는데 650년동안 내내 심했던 건 아니고 스페인 재위기간이 심했음

2. 주걱턱도 실제로는 근친혼때문에 생긴 건 아닌데 근친혼때문에 계속 나타난 건 맞음

3. 순수혈통이니 뭐니 때문에 한 게 아니라 그 당시 정치적 논리가 컸음

4. 스페인 합스부르크가 멸문까지 한 건 악운으로 프랑스 출신 왕비들이 다 후계자 없이 죽어서임




+그리고 주걱턱도 어느 정도는 케바케였음


이 셋이 친자매였는데 장녀와 차녀는 외형적 특징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은 편이었지만 삼녀는 두드러지는 편이었고





이 셋도 친형제였는데 장남과 차남은 외형적 특징이 두드러지는 편이었지만 삼남은 두드러지지 않은 편이었음




형제의 옆모습을 묘사한 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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